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1 운동 (문단 편집) === 국외 ===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나라에 소식이 전해졌다. 「[[뉴욕 타임즈]]」는 3.1 운동에 대해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 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한편 [[AP|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는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천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 고 명시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그 외에도 [[샌프란시스코]]의 「이그재미너」, [[파리(프랑스)|파리]]의 「앙탕트」, [[런던]]의 「모닝 포스트」, [[상하이시|상해]]의 「민국일보」에서도 3.1 운동을 다루었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875281&cp=nv|관련 기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31-4.jpg|width=100%]]}}} || || 워싱턴 타임즈 1922년 3월 5일 자 4면[br]"일본이 한국을 총검으로 노예식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98명의 여자를 학살하다" || 워싱턴 타임즈[* 워싱턴 헤럴드와 합벙하여 워싱턴 타임스헤럴드가 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워싱턴 포스트에 인수되었다. [[통일교]] 측에서 [[1982년]]에 창간한 같은 이름의 신문과는 무관하다.]에 미국의 사업가 로버트 워드가 당시 3.1 운동 이후 일제의 학살 장면을 찍은 사진과 목격담을 제공했다. 3.1 운동은 비록 일본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 한층 자만했던 일본은 초기의 평화적 시위대에게 학살을 가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폭로되어 콧대가 꺾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과잉진압에 대해 비판 여론이 있었는데 [[영국]]의 주한영사였던 윌리엄 M. 로이즈는 조선인들의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하고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직접적으로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여러 정치인들은 이를 빌미로 일본이 [[국제연맹]]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Mark Caprio - "Japanese Assimilation Policies in Colonial Korea, 1910-1945", chapter 4.] --근데 정작 [[미국|본인]]들이 못 들어갔다-- 일본 내부에서는 무단통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 조선 식민통치의 기조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세계적으로 3.1 운동이 알려지자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다른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민족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의 한국에 대한 일반 민간의 인식이 확실히 달라졌다. 운동 이전에는 조선(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무능력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냉소했으며 합병 당시에는 대한제국 백성들은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는 인식이 많았으나[* 실제로는 [[을사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은 저항을 계속했다. 병합할 때 즈음에는 일본의 철저한 탄압으로 대부분이 진압당하긴 했지만.] 3.1 운동 이후 정작 자신들부터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지 못함을 반성하고 항외세 및 항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고 지식인들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한인들의 항일 정신을 매우 높이 샀다.[* 다만 현대 중국인들에게는 5.4 운동을 교과서에서 배우기는 해도 3.1 운동의 영향에 대해서는 그리 잘 언급되지는 않아서 인지도가 높은 일은 아니라고 한다.] [[대만]]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된다. [[인도 제국]]의 비폭력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6|#]][[http://www.metroseoul.co.kr/news/newsview?newscd=2015102000059|#]] 단,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크지 않을 뿐이지 [[자와할랄 네루]]나 [[마하트마 간디]] 같은 당시 인도 독립의 거두급이 되는 인물이나 [[타고르]] 같은 지식인들은 3.1 운동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네루가 딸인 [[인디라 간디]][* 성이 같을 뿐 마하트마 간디와는 아무 관계 없다. 물론 관계 없다는 건 혈연 관계나 부인 등이 아니라는 것이지 당연히 네루의 딸이니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다. 이 문장의 내용은 네루가 3.1 운동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네루와 밀접한 관계인 간디도 3.1 운동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에게 적은 편지들을 보면 일제의 위협에도 3.1 운동에 참여한 한인들을 찬양했을 정도였다. 즉, 간접적인 영향은 주었다는 게 확실하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남미에서도 크게 다루기도 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sid1=104&oid=001&aid=0010653791|#]] 다만 간디에게 영향력을 주었다는 근거 자체는 전무하며 간디 또한 3.1 운동이 있기 30년 전부터 동일한 성격의 민족운동을 해왔다. 3.1 운동이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한국의 특정 독립운동들이 (국제적으로 다소간 서로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인도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거대한 3.1 운동은 일본에도 대단한 충격을 주어 [[데라우치 마사다케]] 내각과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은 "조선인들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이 모양 이 꼴을 만들었냐?!"고 일본인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몇몇 [[일본인]]은 3.1 운동에 감명받아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가 대표적인 예. 하세가와 총독은 와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이후 "이게 다 군바리들이 조선을 가혹하게 통치해서 그렇다!"는 인식이 형성되어 문관총독을 임명하고 [[조선총독부]] 관제개혁이 추진되려 했으나 [[조슈 번|조슈 번벌]] 등의 극렬한 반발로 타협을 본 것이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의 임명이었다. 3.1 운동 이후 본래 군사 통치로 가혹하게 통치하던 조선을 살짝 풀어주는 이른바 '문화 통치'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물론 말만 살짝 풀어준 거지, 할 건 다 하는 정치였다.] 이후 일본의 정가에선 식민지 조선(한국)에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려 할 때마다 "3.1 사건을 잊었느냐?"는 소리가 나오곤 했다. 이후 3.1 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 역시 영국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편지[* 참고로 이 편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로 [[기네스북]]에 올라와 있다. '[[세계사 편력]]'이라는 책은 이 편지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에 식민지 조선의 3.1 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의거를 격찬하며 딸 인디라 간디에게 "이들의 행동을 본받기를 바란다"고 당부하며 "일본 역시 영국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도 같이 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